데포소 Deposo

1980년 5월 15일

뜬금없이 끼어든 신용산 중학교

내가 학교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여기는 시발점은 중학교 배정 때부터였다.
집 주변의 선린, 용산, 배문 다 제치고, 뜬금없는 신용산 중학교를 배정받게 되었다.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신용산, 한강, 오산, 준경 등은 용산의 한강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하거나, 조금 더 동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학교들이었다. 나의 주무대인 원효로 라인과는 심리적으로, 거리상으로도 먼 곳이었다. “누군가의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었을까”라고 짐작해 본다.

버스 노선이 덜 촘촘하던 시절, 교통편이 많은 남영동으로 걸어 나가거나, 버스를 타고 나가야했다. 아니면 용산 청과물시장을 걸어서 횡단하여 한강로로 나가야했다. 거기서 다시 동부이촌동으로 가는 진아교통 38번을 (버스 회사 이름 치고는 이쁘장해서 사장 딸 이름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해보곤 했다.) 타고 들어가야 했던 신용산 중학교. 아파트 단지 안에 자리 잡은 아담한 그 학교 건물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여름에는 정글 탐험가들이 쓰는 돔형 모자 같이 생긴 교모를 쓰고 다니는 공립학교였다. 가끔 근처 상가에 있는 실내수영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의 남녀공학 테두리를 벗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수영장에서 노니는 같은 또래 여학생들을 보며 가슴 설레 하던 기억이 풋풋하다. 나갈 때 맞춰 나가서 말 좀 걸어 보려고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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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뜬금없이 끼어든 남서울 중학교

근데 2학년이 되었을 때인 1979년에 신림동에 있는 신축 교정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름이 남서울 중학교로 바뀌었다. 무슨 이유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동부이촌동 땅값이 올라서 비싼 값에 팔고, 헐값에 변두리 땅을 사서 차익을 남기기 위한 조치였을까? 아니면 급속히 팽창하는 신림동, 봉천동 지역의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공립중학교 하나를 옮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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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등하교 여행을 해야 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쌍문동과 난곡을 오가던 26번 한성운수 버스를 타고 다녔다. 옛날 버스는 운전기사 옆 중간 부분이 파라오의 관처럼 불룩하게 솟아오른 그런 모양의 버스였다. 당시 신림동과 봉천동은 지방 각지에서 서울에 올라와 정착하기 위해 넉넉치 않은 살림을 근근이 이어가던 가정들이 많은 변두리였다. 껄렁한 애들이 많아서 학교 분위기가 썩 상큼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렇게 매일을 여행하듯 다니던 10월의 어느 날, 대통령이 한밤 중에 모처에서 총을 맞고 즉사한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몇일 동안은 온종일 무슨 클래식인지 조곡인지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심복 부하한테 총을 맞고 죽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김계원, 차지철, 김재규, 최규하, 정승화 등의 이름이 매일 티브이와 라디오에서 언급되었다. 그후로도 계엄이니 뭐니 해서 살벌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계속 지속되었다.

처음으로 목격한 시위 현장

다음 해 5월의 어느 날, 쉬는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찻길로부터 큰 함성 소리와 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너나 할 것없이 창가로 몰려가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뭔가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면서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순간 멋져 보였다.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황급히 달려온 전경들이 대오를 형성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최루탄을 무더기로 쏘아 대기 시작했다. 명절 때면 가지고 놀던 푹음탄, 콩알탄이나 폭죽, 화약 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소리였고 무시무시한 연기가 그 일대를 덮었다. 초록색 안드로메다 복장의 전경들은 시위 중이던 학생 대열의 앞과 뒤를 막고, 사복경찰들과 함께 학생들을 연행하기 위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스펙터클 하고 긴장감 넘치는 상황에서 짜릿한 추격전까지 곁들이니 정말 좋은 볼거리였다.

하지만 이내 우리들은 또한 생전 처음 맛보는 최루탄 가스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계단실 쪽에 있던 아이들이 창가로부터 교실이나 복도 반대편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뜻 보니 선생 한 명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니면서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의 엉덩이를 무차별적으로 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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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서 교실로 모두 돌아가라고 하면 그만일 것을 몽둥이 춤을 추는 선생. 시위 구경하는 것이 무턱대고 맞아야 할 잘못된 짓이었을까. 일단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어지는 수업 시간에 선생들은 별말이 없었다. 그냥 시위대 근처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무책임하고 나약한 지시 사항들뿐이었다.

내게 없었던 것들이 많았던 그날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처음 보는 낯선 광경들이 즐비했다. 서울의 교통 중심지인 서울역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으니, 동서남북을 오고 가는 모든 교통 흐름은 끊겨 있었다. 그걸 알리 없는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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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버스 노선을 따라서 걸었다. 신림동 사거리, 신대방 삼거리, 장승백이, 노량진, 한강대교. 차도 위에는 보도 블럭 깨진 조각과 알 수 없는 쓰레기 조각들, 유인물, 막대기, 최루탄 껍데기들이 사방에 널부러져 있었다. 흩뿌려진 물 자국, 최루탄이 터지면서 퍼진 자국, 화염병인지 뭔 지 모를 화염 자국 등이 널려 있었다. 당연히 매웠다. 배는 고프고 목도 말랐다. 아마도 각 대학교에서 각기 시위를 하다가 도로를 따라 행진을 하거나 따로 이동하여 서울역에서 집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산시장을 건너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과 머리는 온통 혼란스럽고 조금 흥분된 상태였다. 대통령이 허무하게 살해당한 이후 한시도 잠잠하지 않았던 시국. 그 즈음 대머리가 발랑 까지고 아주 고약해 보이는 합수부장이라는 인간이 TV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었다. 저 아저씨 뭔가 일 좀 내겠구나 싶었는데 그렇게나 큰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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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뉴스에는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여 전경 대열 쪽으로 돌진하는 바람에 전경 몇 명이 버스에 치어 쓰러지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나쁜 편이지 판단도 안되고 그저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의 지혜도, 부모님의 설명도 뉴스의 사실 전달도 없고, 집에까지 태워주는 버스도, 정신도 없었던 그런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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